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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

20210218

Gazamee 2021. 2. 18. 23:54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매드 프라이드"에 대해서는 정말 그 말만 들어봤지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혹시 내 글이 폐를 끼칠지도 몰라서)

 

 

 

"정병 완치"라는 말은 내 기분을 복잡미묘하게 만든다.

 

정신병(이하 정병)은 분명히 '병'이다. 사람의 심신을 '아프게' 하고, '정상적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저해'한다. 그렇기에 정병은 치료의 대상이다. 나도 그러한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기에, 누군가 "정병이 완치"되었다고 하면 당연히 축하할 일이다. 그 사람은 아마도 정병을 완전히 떨쳐내기 위해 많은 노력(특히 열심히 치료 과정에 임하는 것)을 기울였을 터이고, 아마도 부득부득 이를 갈았을,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요소를 인생에서 (일단) 제거하는 데에 성공하였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여기에 대고 어떻게 축하를 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건 정말로 잘 된 일이다.

 

하지만 솔직히, 만일 나 자신의 정병이 완치될 수 있다면 그건 나에게 어떨지에 대한 생각이 가끔 든다.

 

잡글을 써오면서 꾸준히 얘기했지만, 나는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기 이전부터 제법 오래도록 정병을 앓아왔다. (비진단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단언하는 것이 위험하고 무책임할 수 있다. 하지만 무슨 병이든 너무 고통스러워서 병원에 갈 때쯤이면 이미 꽤 오래 앓은 법이다. 나의 우울삽화와 자해, 자살사고는 한두 해 정도만에 생겨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거의 최악에 가까운 수준으로 치달은 상태에서 진단을 받고 통원치료를 하면서 내 상태는 점점 나아졌지만, "이제 병원에 안 오셔도 되는" 정도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매일 두 번 약을 먹어야 하고, 적어도 3주에는 한 번 의사와의 상담을 가져야 한다. 내가 지금 안정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 이러한 '치료' 과정을 상시 지속한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진 것이며,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먼 옛날부터 내 인생에 들러붙어 있었던 정병을 내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인 후에야 얻은 평화이다. 내가 갖는 정신적 불화 그 자체와 화해를 한 것이다. 나는 이대로 너(정병, 혹은 정병 걸린 나 스스로)를 계속 껴안고 살아갈 것이라고.

 

나에게 있어 이러한 화해는 근본적으로 '완치'의 가능성을 배제한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정병 때문에 인생이 좆같아지긴 하지만 어차피 평생 좆같아야 되는 거 그냥 좋게좋게 가자, 뭐 이런 느낌. 그런데 만일 어느날 의료진이 나를 둘러싸고 박수라도 치면서 "축하합니다! 완치되셨습니다!"라고 한다면? 이제는 약을 먹을 필요도, 병원에 꼬박꼬박 다닐 필요도 없이, (술담배는 이미 마음 가는대로 하고 있으니까) 커피도 적당히 즐기고, 뭐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고 한다면? 내가 정병을 아주 씨게 앓는 나날들을 본 지인들은 축하를 해 줄 것이고, 부모님은 세상 누구보다도 기뻐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행복할까?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개운하고, 드디어 '갓반인'의 삶을 힘차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뭐랄까, 아날로그(?) 계산기에서 양수를 0으로 나누는 순간 숫자가 미친듯이 돌아가며 맛이 가 버리는, 그런 느낌이다. 분명 굉장히 많은 생각이 들기는 한다. 다만 그게 썩 희망차지가 않다. 정병 때문에 치가 떨리던 시절도 있었고, 그럴 기력조차 없이 몸도 마음도 바닥에 고여버린 적도 있었다. 그랬는데도, 이게 정말 싹 나아버리고, 내가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건... 나의 목표도 아니고, 그냥 상상 자체가 안 된다. '치료'가 끝난다고 해도 내 과거의 상처, 미래의 불안,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현재의 고통은 결코 소멸될 수 없는 것들인데. 아닌가? 의사 생각은 나랑 좀 다르려나? '완치'라는 것 자체가 이미 더이상 이런 것들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보장인가?... 뭐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결국 머리가 멍해지면서 더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럴때면 담배 한 대 태우면서 생각을 한다. 어차피 나랑 상관도 없는 일에 골머리 썩히지 말자고. (물론 이 생각 자체가 다시 '완치'와 나 사이에 담을 쌓는 것이기에, 결국 빙글빙글 도는 문제이다.)

 

관점을 바꾸어서, 나는 왜 내가 이렇게 정병을 '빼앗기기 싫어'하는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다른 자잘한 것들도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부정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철들 무렵(그게 언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시작점을 출생으로 잡는건 너무 오바같다)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을 '평생을 함께 갈 정병과의 화해 과정'으로 규정함으로써 지금의 평화를 얻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규정하기까지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이제와서 나한테 "야 너두 완치 가능해!" 하면 "아 씨발 꺼져요" 소리가 나오겠지. 지금을 위해 다져온 각오나 주변을 설득하는 데 들인 힘이나 뭐 그런 것들이 생각나면서 인생 겁나 억울해질 것 같단 말이야... "그건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고, 완치되면 해필리 에버 애프터 메데타시 메데타시 아니야?"라고 할 수 있겠는데, 아니 그럼 내가 애초에 정병에 걸리기나 했겠나? (급발진)

 

아무튼... 스스로의 상태가 이렇고, 또 내가 빈말을 거의 안 하는 성격이기도 하기 때문에, 다른 정병러들한테 하는 격려에서는 언제나 "완치" "회복" "탈출" "지금만 버티면" "다 괜찮아질 것" 같은 말들을 애초에 배제한다. 애초에 내가 그런 것들을 바라지 않으니까. 내 삶의 평화는 그것들을 다 포기한 다음에야 비로소 찾아왔으니까(물론 이것은 단순한 자기만족일 수 있다... 그러니까 글이 오락가락하고 머리가 아프지...). 대신 나는 "좀더 견딜만한 삶"이라는 표현을 애용한다. 그거야말로 나처럼 평생 정병이랑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든, 아니면 진짜로 정병 그 씨발것 인생에서 뿌리뽑겠다고 다짐한 사람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무난한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일개 정병러이지 뭐 의학적 지식을 막 갖고있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기때문에, 특정 시점을 기해 찾아온 급성 우울증으로 인해 급격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데에 대고 가불가를 논할 수 없다. 논할 생각도 없다. 다만 그냥 나는... 나의 목표가 그들과 같다고 결코 말할 수가 없다. 뭐랄까... 그냥 서로의 입장이 너무나도 다르다고 느낀다. 매우 거칠고 불확실한 비유를 하자면, 그들은 골절로 입원한 사람들이라고 할 때 나는 뭔가... 남들에 비해 확실히 위태롭긴 하지만 관리를 잘 하면 괜찮은 평생질환을 진단받은, 그런 차이를 느낀다. 그런데 사실 그게 아니었다면? 다들 그냥 똑같이 물에 빠져있는 상태인데, 남들이 헤엄쳐서 뭍으로 올라가는동안 나는 부표 하나 붙잡고 "어쩔 수 없어, 나는 이렇게 살아갈거야. 잘 붙잡고 있으면 대체로 괜찮아. 가끔 파도가 너무 심하게 치지 않는 이상 그냥 내가 잘 떠있으면 돼. 물에 빠져있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 지랄을 떨고 있는 거라면? 정말 한심하고 형편없는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처음에 말했듯이 이건 어찌됐건 '병'인데, '치료'와 '극복'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데,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비정상적'이고 '해로운' 것을 긍정하고 있는 셈일테니까. 아니 근데 이제와서 이 '비정상적' 평화를 깨고 발버둥치라고 하면요...

 

글이 뱅글뱅글 돈다.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 글로 풀면 좀 나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실패같다. 그냥... 지금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1) 최소한 지금의 나는 정병의 '완치'를 바라지 않는다, 2) 어차피 내가 만난 그 어떤 의사도 완치같은 얘기 한 적이 없는데 이딴 생각 해봐야 김칫국 마시는 것밖에 안된다(ㅋㅋ), 3) 이런걸로 앓고있다니 그거야말로 진심 정병러답다(ㅋㅋㅋㅋㅋㅋㅋㅋ) 정도인 것 같다. 안그래도 약으로 조절하고 있는 수면사이클을 희생해서 쓴 글의 결과가 이거라니 원. 한참 글 쓰느라 어깨만 아프다. 그냥... 생각을 그만두고 자야지. 다음에 또 이런 생각 들면... 그때 또 빙빙 돌지 뭐.

 

 

추기 : 나는 '기존 통념상 비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비정상'인 정병을 긍정하는 경향이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건 뒤집어 말하면, 내가 스스로를 '정병러'라고 정체화하고서는 더이상 그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기로 해버렸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근데 와씨 인간적으로 내가 이딴것까지 고민하고 자빠졌다가는 솔직히 진짜 이것 자체로 정병을 더 악화시킬 것 같다. 에라이, 생각 없이 멍청하게 살고 싶지 않은데, 생각을 하다보면 그냥 지금은 생각을 그만두자는 결론밖에 안 나오냐 어떻게. (그래도 계속 생각하려는 시도를 해야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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