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

210926

Gazamee 2021. 9. 26. 21:32

가을이 되면 사람이 센치해진다는 말이 결과적으로 맞긴 맞나보다. 엄밀히 말하면 조금 다른 것일지도 모르지만, 크게 다를 것이 있나 싶다.

이전보다는 (무게상) 많이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공원을 걷다가, 허리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를 지나쳐왔다. 흘끗 시선을 위로 향해보았지만 그 정도로는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남자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몇백 미터쯤 더 걸었을까, 불현듯 예전 생각이 났다. 아, 안되는데... 하지만 한번 터져나온 기억을 쓸어담는 건 불가능했다.

대단히 슬프거나 불쾌한 과거가 떠오른 것은 아니다. 밤 11시가 조금 안 되었을 시간, 마지막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행정관 앞에 혼자 서 있던 겨울밤을 생각했다. 두툼한 목도리의 틈을 파고들어 귓불을 날카롭게 베어내는 바람에 어쩐지 상쾌함과 비슷한 것을 느끼며, 얼어붙은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넣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날. 몇 시가 되어도 꺼질 줄을 모르던 도서관의 불빛을 뒤로 한 채 별을 하나라도 더 찾으려 까만 밤하늘을 눈이 시리도록 헤집던 기억. 오히려 조금 아름다울지도 모르는, 그저 수없이 반복되던 일상의 단편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한없이 옅어지며 무겁게 가라앉는 감각에 괜시리 발을 돋우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걸까. 아마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나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 미래는 보이지 않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 배우고 싶지도, 움직이고 싶지도 않다. 그저 내 체취가 진득하게 묻은 이불 속에 몸을 뉘이고플 뿐. 내 삶의 열정을 다시 불태워줄 누군가를 막연히 그리워하지만 사실 어떠한 실체도 없는 심상. 나를 감싸주었던 짤막한 온기들은 얼어붙은 내가 녹아내릴 틈도 없이 떠나갔다. 그리고 남겨진 나의 외로움은 애매하게 견딜만 한 것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냥 그렇게 혼자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금 깨닫고는 하는 것이다. 그렇구나, 나는 이렇게 영원히 혼자겠구나.

우울하냐면, 아마 그럴 것이다(애초에 그래서 정신과에 다니고 있으니까).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죽고싶다는 식의 감각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뭐랄까, 언제 죽어도 상관이 없겠다는 것을 불현듯 재확인할 뿐. 나라는 사람에게 남은 게 도대체 뭘까? 만일 주마등이라는 게 정말로 있다면 나는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할까? 아, 내 최애 새 이벤트 한섭 실장 아직 안했는데. 우리 팀 아무개가 시즌 끝나기 전에 홈런 하나 더 칠 수 있을까. 아직 못 마셔본 술들이 궁금한데. 만화책 사 두고 아직 안 읽은것도 많고. ... 이런 따위의 것들밖에 생각나지가 않는다. 그만큼이나 나를 삶과 엮어주는 것들이 적고, 또 실낱같다. 물론 이런 것들을 글로 쓰고 난 다음에는 소중한 사람들이 떠오르긴 한다. 하지만 나에게 (사실은) 그들이 가장 소중하지 않은만큼, 그들에게 나도 가장 소중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이 모든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아주 효과적인 정신과 약물 치료의 결과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냥 이 모든 것들이 내 마음속을 복잡하게 하고 있는 와중에도 한편으로 나는 조금은 남일 보듯이 이 고요한 아수라장을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이런 감정들을 누군가에게 토로하며 눈물짓거나, 타인의 체온을 갈구하며 위로받고자 손을 벌릴 일은 아마도 영원히 없을 거라고, 사실은 별 근거도 없이, 하지만 어쩐지 아주 분명하게 확신하면서.

운이 좋아서(혹은 나빠서?) 마흔이나 쉰, 그 이상을 살게 되더라도 내 삶은 언제까지나 이렇게 어딘가 빛이 바랜 것이겠지. 타인에 대한 감정을 연료로 찬란하게 불타오르던 어린날의 동력은 두 번 다시 불꽃을 피우지 못하겠지. 나는 그렇게, 그리고 이미 이렇게 혼자이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낼 방법은... 아마 있겠지만 대충 없다 치고, 어쨌든 뭐 좀 슬픈 것도 같지만 그냥 뭐, 그렇구나. 오늘은 더이상 누군가의 반짝이는 삶 같은 걸 볼 기력이 생기지 않지만, 땀이 나도록 한 시간을 빠르게 걸으며 이 모든 걸 글로 쓸 생각을 했고 실제로 다 썼으니 이제 자고 일어나면 이 기분도 어영부영 흐려지겠지... 그런 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 길게 썼지만, 나의 한 트친의 표현을 빌려 요약하자면 나는 지금 대충 "케미컬 소우난다" 상태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내일은 또다시, 무엇이 "그랬었"는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 걸어잠그고 그냥 그럭저럭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