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일지 6/7/8일자
6일차(12/12 이어서)
서울에 도착하니 안 추운데 추웠다. 부산에 있다 왔으니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건강검진에 늦지 않기 위해 허이모네에서 하루 신세를 지기로 했고 그 전에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기 때문에, 집에 들러서 검진받기 편한 옷으로 환복하고 속옷을 챙겨와야 했던 나는 바삐 움직여야 했다. 급하지 않았더라면 501을 반대방향으로 타서 종로 찍고 여유롭게 앉아서 가볼 생각이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 결국 또 종점행을 탔다. 여전히 지독하게 사람이 많았다. 보통 상도터널이나 숭실대입구 정도 오면 자리가 나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거기까지 가서도 자리가 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맨 뒷자리나 맨 앞자리같은 것이 간혹 나기는 하였으나, 기차여행에 이어 장시간을 버스에서 서 있다보니 앉기 위해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중간 자리가 난 것은 아마 관악구청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심지어 관악구청에서도 사람이 한가득 타서 결국 종점에 갈 때까지도 버스는 만원이었다. 이랬던 적이 없어서 약간 당황스러웠다.
얼른 집에 올라가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버스에서 땀이 나서 안에 받쳐입었던 목티를 그대로 입고 가기가 곤란했던지라, 간만에 브라를 차고 맨투맨을 입었다. 그 위에 집업후드를 겹겹이 껴입고 패딩조끼를 입었다. 이것들을 다 합쳐서 그냥 하나의 아우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양말도 갈아신고, 속옷과 증정용 에센스를 챙겨 나왔다. 낭비되는 시간 없이 나름대로 뽈뽈대며 움직인다고 움직인 것인데도 원래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 즈음에는 녹두에서 설입행 버스를 타는 게 고작이었다.
에쎌과 리타와 함께 제주상회에서 고기국수를 먹었다. 제주상회에 가 본 적이 없어서 길을 좀 헤맸는데, 웨이팅에 딱 맞게 도착했다. 국수가 맛있었다. 고기의 비계를 뜯어내는 리타와 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 에쎌을 보며 조금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국수를 먹고 나와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리타와 에쎌까지 다같이 허이모네 집으로 가게 되었다. 두 사람은 책상에 앉아서 할 일을 하고, 허이모도 침대에 앉아서 자기 할 일을 하고 나는 바닥에서 게임을 했다. 참으로 잉여로운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잉여 맞지 뭐.
꽤 늦은 시간이 되고 에쎌은 먼저 돌아갔다. 한편 근처에서 편집회의 뒤풀이를 하고 있던 성미가 합류를 하였다. 그리고 허이모가 내어준 술을 마시고 매우 신속하게 취했다. 막차 시간이 좀 아슬아슬하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그냥 막차를 포기하였다. 나는 캐모마일 티를 마시다가 10시 47분쯤에 12시간 금식에 대해 깨닫고 차 마시기를 중단한 뒤 생수에 약을 먹고 적당한 타이밍에 자리에 누웠다. 옆으로 눕고 노트북도 눕혀서 괴담을 읽다가 서서히 잠이 들었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허이모와 성미가 "이 사람 진짜 수면제 먹고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구나" 어쩌구 했던 기억이 얼핏 난다.
7일차(12/13)
아침 7시 반에 번쩍 눈을 떴다. 브로마제팜을 먹고 자면 아무래도 역시 꿈 같은 걸 꾸지 않고 개운하게 잠에서 깰 수 있는 점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옆을 보니 역시나 귀가를 포기한 성미가 자고 있었다. 성미도 자고 갈 줄 알았더라면 까는 이불을 내가 반 접어서 깔지 않고 다 펴서 같이 깔았을텐데 좀 미안했다. 어차피 약기운에 취해서 금방 다시 잠들테니 좀 깨워서 이불 펴달라고 했어도 펴주고 다시 잘 잤을텐데. 아무튼 다른 사람들을 깨워가며 씻을 필요는 아직 없는 시간이라, 누운 자리에서 핸드폰 게임을 한 시간 정도 했다. 그리고 8시 반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감기 전에 거울을 보니 역시나 중력을 가뿐히 무시한 머리가 되어 있었다. 자면서 뭔 짓을 하면 머리가 이렇게 되는지 짐짓 의아해하며 머리를 감았다. 대신 드라이를 하지 않아도 깔끔한 머리모양이 유지가 되니까 특별히 불만은 없다. 머리가 좀 길었다는 느낌이 있어서 슬슬 미용실에 가서 끝을 좀 잘라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씻고 나오니 허이모랑 성미가 일어났다. 검진 1시간 전까지 흡연이 괜찮다고 해서 담배를 필까 하다가 나가기 귀찮아서 그냥 포기했다. 예약확인증을 출력하러 가서 혹시 수정 가능하게 되어 있는지 체크를 해봤지만 역시 안 돼 있었다. 사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기대하기 힘들기도 했다. 동방에 들러서 짐과 외투를 내려놓고 잠시 앉아있다가 보건소로 내려가 검진을 받았다. 전체적으로 그냥 검진 받는 과정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약 먹는 얘기를 결국 알아서 해야 했던 것, 혈압을 재는데 두번째 잴 때 혈압이 약간 올라갔던 것, 시력검사는 나안 시력을 따로 측정하지 않고 그냥 바로 교정시력만 잰 것, 흉부CT 촬영 도중에 정신과 재검 문제로 전화가 왔는데 내가 핸드폰을 안 가지고 있어서 진료실 전화 직통으로 온 것, 인바디를 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내가 뚱뚱했던 것, 소변검사 결과지를 따로 수거할 줄 알았더니 그냥 바로 휴지통에 버리라고 해서 이럴거면 애초에 검사를 왜 하나 의아해했던 것, 알러지 검사를 하면 등에 뭔가 잔뜩 테스트를 할 줄 알았더니 그럴 필요가 없고 혈액검사를 위해 뽑은 피로 한번에 다 한다고 해서 추가시간이 들지 않게 된 것, 주삿바늘을 꽂았는데 피가 안나와서 더 깊이 찔러넣다가 "아 됐다" 하고 중얼거리셨던 것, 월화는 치과 진료가 무료라고 해서 별로 안 가고 싶었지만 갔다가 치석+충치+사랑니 3콤보를 맞고 스케일링이라도 예약을 하라고 붙들려서 금요일 스케일링 예약을 한 것, 그러고 나서 다 까먹고 동방에 가 있다가 뒤늦게 마지막으로 설문 작성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부랴부랴 뛰어내려가서 설문을 작성하고 온 것 정도가 있겠다.
예상과 달리 추가검사에 시간이 들지 않았고, 허이모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12시간 금식 정도는 사람이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안 먹는 정도라면 그냥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에 배도 그렇게 고프지 않은 상태여서 같이 만두를 먹으러 갔다. 고기만두와 새우샤오마이, 소룡포를 시켜서 나누어 먹었다. 그러고 나서 정신과에 갈 때까지 시간이 좀 비었는데, 집에 가기는 싫어서 다시 허이모네로 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짐을 그냥 놓고 나올 걸 그랬다는 얘기를 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지라 별 수가 없었다. 허이모네에서 빵또아를 하나 뜯어먹으면서 도깨비를 보았다. 남자 인물들은 남자 인물들끼리, 여자 인물들은 여자 인물들끼리 사귀면 좋겠다는 얘기를 두런두런 하였다. 중간에 허이모가 간식으로 치킨을 먹고 싶어해서 허이모에게는 무한리필 닭갈비 저녁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드라마가 두 편째에서 반 이상 넘어갔을 때 허이모네를 나왔다. 허이모도 중고책을 팔 게 있다며 같이 신림역 쪽으로 가기로 했다. 허이모네 집 앞에서 담배를 피며 아빠가 제시했다고 전해들은 회사 얘기를 했더니 허이모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얼른 거기 들어가서 다양성 전형을 뚫으라고 얘기를 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 얘기가 부담스럽고 이런 식으로 내가 채용되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주변에 자꾸 자랑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도 그게 맞았으며, 그 점이 나 자신에 대해 대단한 환멸을 느끼게 하였다.
낙성대에서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양지병원은 다시 봐도 삐까번쩍했다. 정신과로 가면서 좀 쓴웃음이 났다. 보통 정신과 약물은 제대로 약효가 들기 시작하려면 몇 주가 걸리는데, 심각한 상황이라던 나는 집에 잠시 다녀온 것만으로 마음이 너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많이 편안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 진료가 조금 밀려서 예약 시간보다 5분정도 더 기다렸다. 의사에게 집에 다녀온 얘기를 있는대로 다 했다. 의사는 잘 했다고 말했고, 이제 그 이상은 부모가 알아서 할 일이며 나의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마음이 좀 편해졌다. 약은 잘 맞느냐고 해서 그런대로 괜찮다고 했고, 자해는 했냐길래 하려고 하다가 약을 먹은 것 때문에 그럴 기운도 없어져서 그냥 누워 잤다고 했다. 낮에 좀 많이 졸리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래도 딱히 약을 바꿀 정도는 아닌 것인지 똑같은 약을 처방해 주었으며, 다음주쯤 경과를 보고 병원에 오는 간격을 조정하자는 얘기를 했다. 양지병원은 좀 상담 위주라서 더 건조한 병원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기도 약간 애매해졌다. 게다가 어차피 그리 자주 올 게 아니라면 특별히 바꿀 필요도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정적으로 어차피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정신병에 대한 근원을 모조리 거기서 찾아내려는 짓을 볼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병원 옮기기는 좀 보류하기로 했다. 진료는 빨리 끝났고 처음부터 끝까지 울지 않았다. 진료실을 나와서 화장실에 갔고, 그 전날 낮부터 변의가 있었던지라 장을 비워냈다. 어차피 뚱뚱한 주제에 이 무게를 빼고 체중을 쟀었다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몇 그램이나 차이 난다고.
지난주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무인수납기에서 진료비를 결제하고 처방전을 출력했다. 지난주에 갔던 근처 약국에 그대로 가서 약을 받고 언덕길을 넘어오는데, 지난주와는 또 다른 사람이 얼굴에 복이 많다며 말을 걸어왔다. 종합병원과 한의원과 약국만 있는 길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얼굴에 복이 많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지금 재수가 없는 상황일 터인데. 나는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뭐 어쩌라고, 라는 표정을 지어보이고 한 마디 대답도 없이 발길을 재촉했다.
원래는 느긋하게 녹두로 가서 코인노래방에서 좀 놀다가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카톡방을 보니 한기연에서 동방 앞에 뭐 이상한 걸 붙였다고 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디테일 재정비리 어쩌구인데, 글자 크기 좀 줄여서 총학실 앞 게시판에 붙였으면 됐을 것을 굳이 대문짝만하게 예닐곱 장은 뽑아서 우리 동방 앞에 붙여 놓은 게 짜증이 났다. 그래도 무대응을 했으면 좀 편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요즘 상시 분노치 맥스를 찍은 탱커 겸 딜러 불레즈가 바로 항의전화를 했다고 한다. 걔네가 와서 떼는 일같은 건 당연히 없었고, 우리가 한번 항의전화를 해놓고 나니 주변 동아리에서 조롱의 의미로 이것저것 붙이는 것이 자꾸 우리 동아리에서 한 것처럼 보일까봐 떼어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동방 리모델링 회의가 있어서 온 사람들과 얘기를 좀 하면서, 어떻게 대응할지 간단하게 얘기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리모델링 회의를 했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욕이 앞서서 여기저기 발을 들였다가 또 정신이 무너져 버릴 경우 어떻게 되는지 잘 알기에 굳이 나에게 짐을 많이 지우지는 않기로 했다.
회의가 끝나고 나니 염이랑 뚜부가 술을 마신다고 해서, 기숙사에 가서 맥주를 사오는 김에 내가 마실 것도 한 캔 부탁했다. 종류를 지정하지 않았더니 스텔라를 사왔다. 무난한 술이라 좋아한다. 다만 약을 먹다보니 술이 깜짝 놀랄 정도로 안 들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을 마시며 온갖 불평불만 얘기를 했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만사에 불만이 가득한가 하는 또 회의감이 몰려왔다. 작년 같았으면 아마 집에 가서 자해를 했겠지만, 이젠 딱히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이러다가 지금보다 더 심각한 꼰대가 되어버리지만 말자는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11시 10분 셔틀을 타러 갔다. 나름대로 여유 있게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종강 직전이라 줄이 엄청 길었고 셔틀을 결국 탈 수 없었다. 집에 걸어갈까 하다가 코인노래방에 갈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버스를 탔다. 가서도 체력이 평소만 하지 못해서, 늘상 부르던 것의 반 정도만 하고 나왔다. 집에 들어올 때 따로 뭘 사지 않고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의외로 물이 없었다. 그래서 약을 그냥 먹고 금방 잠이 들었다.
8일차(12/14)
이 날은 병 걸린 사람처럼(병 걸린 게 맞지만) 하루종일 잠만 잤다. 여독이라는 게 의외로 정말 무시를 못 할 것이었든지, 아니면 그렇게 될 만큼 내가 나이를 먹었든지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애초에 잠에서 깬 시간도 9시가 넘은 때로, 근래에 약을 먹고 잤던 다른 날에 비해서 꽤 오래 잔 셈이었다. 중간중간에 깨서 귀신처럼 게임은 했지만, 아무튼 다른 것을 할 기력은 전혀 없었고 계속 자다 깨다만 반복했다. 약 자체는 식후에 먹어야 한다거나 그런 게 전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종일 아무것도 안 먹기는 뭣해서 뽀글이 라면을 하나 만들어 먹었다.
(퇴근해야 되니까 15일꺼는 내일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