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Gazamee 2018. 3. 12. 16:01
라는 말로 퉁쳐지는 두 가지의 상황, '다른 것을 해야 할 때에 이것을 "하고" 있음'과 '무언가를 해야 할 때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은 너무나도 다르다. 언젠가 나는 다른 것을 '하는' 데에 열중했던 적이 있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 지냈던 나날이 훨씬 많다. 그 때의 나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활기찼고, 아주 유쾌하게 쓸모없는 것들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의 무기력한 삶은 천천히 전자로부터 후자로 잠겨든다. 쓰잘데 없는 짓만 하고 살았던 형편없는 과거가, 무어라도 할 수 있었던 절박한 단절로 남았다.

어제 아침에는 시험을 치러 갔어야 했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알람을 들었고 그때 정신을 차릴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를 선택했다. 그 순간 내가 정말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할 만큼 무기력하고 내 의지 바깥으로 밀려나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말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기만이라는 사실을 회피할 수 없다. 어지간한 현실에서 도망치기에 능숙한(사실은 그냥 모래구덩이에 대가리를 처박고 있을 뿐이지만) 나조차, 내가 '가기 싫어서' '안 가기로 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간 하루의 다음날, 잠이든 만화든 코트의 허리끈이든 내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마주한 새 날은 여전히 안온한 나태와 와닿지 않는 절망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대개 나와는 별 상관도 없는 이야기들로 시시덕대며 하루를 낭비하고 돌아올 때 나는 종종 어찌할 도리가 없는 우울에 휩쓸리고는 한다. 그것은 멀쩡하게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느끼는 열등감이기도,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있었던 자리가 흩어져버린 허무이기도, '놀고나 있을 때가 아닌데 유흥이나 즐기고 있다'는 자괴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문득, '나가서 놀기라도 했던 자신이 그조차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추락하는(사실은 그냥 돌아오는) 순간'의 절망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 나는 그것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양쌤이 '하면 안되는데 하게 되는 것'을 물었을 때 나는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안 하게 되는 것'을 답했다. 그건 전혀 다른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