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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

가구

Gazamee 2019. 8. 13. 12:42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화목한 가정이란 무엇일까. 자상한 아버지와 현명한 어머니, 사이좋은 형제자매 정도면 괜찮은 것일까. 얼마나 함께 웃으면 화목해지고, 얼마나 서로 싸우면 험악해질까. 잘 모르겠다.

 

우리 가족은,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런대로 사이가 괜찮은 편이다. 부모님이 돈 문제로 한창 이혼을 얘기하며 싸우던 시기는 10년이 훌쩍 넘었고, 네 가족이 함께 살면서 아주 큰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는 편이다. 가끔 엄마와 아빠가, 혹은 부모님과 언니가 싸우는 일이 있지만 그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보통 제외되어 있다. 언급만 될 뿐. 그리고 나는 그게 늘 싫었다.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언니와 부모님 간에 싸움이 났다.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 발단은 아주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만일 싸움이 오로지 그 발단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었다면 제법 빨리 끝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가족 간의 싸움이란 그리 쉽게 풀리지 않는다. 너무 오랜 기간을 함께 한 사람들이라 서로를 너무 잘 알고, 그만큼 해묵은 악감정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에 뿌려진 다툼의 씨앗은 땅 속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다가, 한 번 싸움이 엎질러지면 그것을 기회로 싹을 틔운다. 어제가 그랬고, 온갖 이야기들이 마구 뒤섞여 터져나왔다. 모두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소리를 내 방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들으며 나는 방문을 닫았다.

 

언니는 늘 나에게 '별 것도 하지 않으면서 편하게 지내고 집에서 돈을 받아먹는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용돈이 아니라 월급이긴 하지만, 아직 회사 일이 많지 않은지라 대충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한편 엄마는 '언니에게만 신경쓰느라 나에게는 충분히 관심을 기울여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대치되는 생각들은 싸움이 날 때마다 그들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쟤한테는 '잘만' 해주면서 나한테는 왜 그러냐는 둥, 오히려 '착하게' 지내는 쟤한테는 그만큼 해주지도 못했는데 너는 다 받고도 왜 그러냐는 둥.

 

그렇게 언급될 때마다 나는 그들의 갈등을 중재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된다. 언니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려다 공연히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것도, 엄마에게 느닷없이 (짜증 섞인) 사과를 받는 것도 다툼을 해결하는 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발언권을 가진 가족구성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냥 집 어딘가에 놓여 있는 가구 같은 존재가 되기를 택한다. 나는 가만히 있는다. 험한 소리가 오고갈때, 물건을 집어던지는 소리가 날 때, 분을 못 참고 발을 구르는 소리가 날 때, 조금씩 상처를 입어가면서.

 

이런 때 나는 평소의 내 생활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구체화됨을 느낀다. 아빠가 내 기분은 개의치 않고 허풍을 잔뜩 섞어 나를 남들에게 자랑할 때, 엄마가 나를 어르고 달래어 아무튼 엄마 보기에 괜찮은 상태로 만들 때, 언니가 별다른 대답이 필요치도 않은 대화를 일방적으로 내게 쏟아낼 때, 나는 종종 그들과 내가 동등한 가족구성원이 될 수 없다고 은연중에 생각해왔던 것 같다는 것이다. 차라리 나는 집안 어딘가에 놓인 하나의 가구이다. 꼼짝도 못한 채 온갖 소리를 일방적으로 듣고, 삿대질을 당하고, 가끔 내던져지기도 하는(물론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존재. 관상용일 때도 있고 기능적일 때도 있지만, 아무튼 다른 가족들과 동일선상에 놓일 수는 없는 그런 존재.

 

싸움이 지나간 후, 이렇다 할 화해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그저 절정에 달했던 분노가 침묵 속에서 조금씩 식어갈 뿐이다. 언젠가 다시 터질 가능성을 남겨둔 채, 꽃을 피웠던 갈등은 다시 씨앗을 땅에 뿌리고 시들어간다. 언니는 이러한 일들이 별로 드물지 않고, 늘 이렇게 마무리가 되며, 그러므로 내가 특별히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타적 감정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냥 내가, 갈등을 재는 어떤 척도가 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조용히 상처를 입을 뿐이다.

 

 

+

쓰면서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내가 낄 수가 없는데 내가 뭘 어떻게 더 신경을 써줄 수 있단 말인가. 상처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내 상처를 숨기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다들 저렇게 이기적인데 나만 굽혀서 뭐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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