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정병

20201224

Gazamee 2020. 12. 25. 00:08

구글닥스에 들어온 질문을 오랜만에 확인했는데... "객관적으로 봤을때 꽤 괜찮은 환경에서 사는 것 같은데 왜 자존감이 낮으냐"는 요지의(잘못 이해했다면 죄송합니다) 질문이 들어와서 생각중입니다만... 어... 저는... 자존감이... 높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그나마 지금 좀 높아진 편인 것 같은데? 그 전에는 존심만 쎈 고집불통이었지 자존감... 자존감? 모르겠네요... 그러게요 왜 낮아졌을까요... 근데 항상 낮았는데... 진짜루...

 

어느 특정 시점을 기해 우울증이 들이닥친 경우에는 도무지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자신에 대해 고민이 많이 되기도 할 것 같고 저같은 사람(사실 맞는 말씀 하셨죠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럭저럭 괜찮은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보면 어쩌다 저렇게 자낮이 되었나 싶기도 할것같아요. 근데 일단 제일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는 소위 말하는 철들 무렵부터 이미 항상 자낮이었고 그래서 공부든 연애든 2차창작이든 이런저런 활동이든 자아의탁을 하느라 아주 끝내주게 매달려왔어요. 뭔가 결과가 나오니까, 주변에서의 격려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돌아오니까. 뭐... 언 발에 오줌이라도 누면서 살아온거죠.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저는 정신과를 다니면서 사람이 이럴 수도 있구나 이렇게 살아도 죽지는 않는구나(혹은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구나) 같은 것들을 차근차근 몸에 배도록 하면서 죽도록 증오스럽던 삶과 공존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나는 그냥 앞으로도 이 불안정한 감정을 다독여가면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게 뭐 대단히 비극적인 것도 아니구나, 약을 먹고 의사와 상담하면서 많이 다스릴 수 있구나, 뭐 그런 것들? 예전처럼 인생을 파워풀하게 견인할 수 있는 뭔가가 없다는 건 좀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어차피 이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고... 바꾸어 생각하면 사실 그만큼 나를 불살라서 '뽕차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구나 싶어서 잔잔하게 안심이 되기도 하고 그래요. 오히려 저같은 경우에는 이런 긍정과 수용을 통해서 자존감이 점진적으로 높아진 편일거에요... 긴 글 쓸때는 보통 우울할 때라서 그게 잘 안 드러나겠지만요(ㅋㅋㅋ).

 

아무튼 제 경우는 그렇단 거고... 앞에서 한 번 말했듯이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우울증이 삶을 파괴하는 바람에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감각에 고통받는 분들의 경우 저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긴 해요. 아무튼간에 '정상인'이라면 아마도 별 연이 없을, 어쨌든 내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게 분명한 무언가를 껴안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이새끼를 반드시 떼어내고 내 삶을 찾아가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 이놈새끼랑 나랑은 평생 같이 살아야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둘 다 '틀린' 게 아니기 때문에 모든 정서를 공유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죠.

 

그럼에도 제가 뭔가를 말해야 한다면/말할 수 있다면... 음, '우울로 인해 내 인생은 파괴되었고 그 이전과 동일한 수준으로 수복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감각은 그 자체로 또 우울을 부르는 악순환을 초래하니까, 그런 생각을 너무 많이는 안 하셨으면 좋겠고요(물론 극복을 향한 의지는 중요합니다. 이 사이의 균형은 사실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어떤 지점을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봐요).

 

또 병원가는거... 사실 저는 운이 좋아 그럭저럭 괜찮은 병원을 많이 다녔고, 그래서 비교적 쉽게 통원을 권하는 편이라는 것도 자각은 있는데요, 그래도 병원에 가기를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가 '가족에게 걱정을 끼칠까봐'라면, 더더욱 병원에 가보시길 권합니다. 통원치료를 받게 되는 게 뭔가 부정적으로 큰 일일 것 같은 느낌이 있긴 하지만(저는 한번 정신과 다녀오면 어딜 가서 뭘 하든 무조건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다 공개적으로 찍힐 줄 알았어요) 일단 저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았고, 가족들의 경우에도 제가 병원 다니는 걸 덤덤하게 넘길 수 있게 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결국은 받아들였습니다. 같이 삶을 꾸려나가기로 한 사람들에게 걱정을 전혀 안 끼치고 살아갈 수는 없어요. 그리고 가족들이 하는 그 걱정이, 내가 더 견딜만한 인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딸려오는 것이라면, 걱정 중에서는 꽤 괜찮은 류의 걱정이 아닐까요.

 

이것저것 고민하다보니 날짜가 바뀌었네요. 질문자분이 납득할 수 있을만큼의 평안이 삶에 깃들길 기원합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언제든 다시 질문 남겨주세요.

'정병'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0124  (0) 2021.01.24
20210105  (1) 2021.01.05
20201223  (1) 2020.12.23
시간이 지나도  (0) 2020.08.26
20200811  (1) 2020.08.11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