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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

그 이후의 생활

Gazamee 2018. 1. 15. 00:44
넘쳤던 의욕은 여독을 핑계로 한 나태의 그림자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휴대전화 알람 대신 세탁기가 정시에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느지막이 일어나 빨래를 개고 또 널었다. 내일부터는 나다녀야지, 라고 스스로도 반신반의한 의지를 공연히 내세워보다가 미세먼지 예보를 보고 조금 안심했다. 내일의 나는 계획에 뒤처지는 대신, 계획대로 게으른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다급히 생활을 꾸려보려는 시도가 얼마나 많이 실패했는지, 그 실패가 또 얼마나 많은 다른 실패로 이어졌는지 기억한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빌미로 얼마나 오래 그저 드러누워 있었는지도 기억한다. 무얼 해도 혹은 하지 않아도 앞날이 그저 불안하지만 나는 그냥 좀 게으르기로 한다. 적어도 그냥 누워있기만 한 것도 아니고, 당장 인터넷으로 사야 할 것들은 다 주문했고, 친구들은 조만간 만나서 이사 선물 받으면 되고, 그치만 뭐 무리할 필요는 없고. 그 뭐냐, 나 지금 왼쪽 다리도 좀 상태가 안 좋으니까. 뭐 그렇게 좀 게으르기로 한다.

어떻게 그렇게 바깥에서는 멀쩡했냐는 말들을 많이 들었고, 아마 한참을 더 들을 것이다. 사실 난 언제나 내가 멀쩡해 보이는지 늘 불안했고, 내 집의 상태가 어떤 형태로든 탄로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 자신의 몸뚱이의 세척과, 당장 입고 다니는 옷가지의 세탁만은 어떻게든 해내야만 했다. 물론 그래봤자 불어나는 쓰레기의 퇴적층 아래로 수많은 옷가지가 파묻혀갔고, 겨우 끄집어낸 것들의 절반은 버렸고 절반을 남겼다. 그래서 다시 그 절반쯤은 세탁을 하였으니, 옷을 개고 빨고 널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고요한 나날도 너무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의 변명도 그때쯤이면 한 차례 바닥이 날 터이다.

환기 없이도 한나절이면 빨래가 바짝 마르는 이 방의 건조함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씻고, 쓰레기 내다 버리고, 담배나 한 대 피고 와서 빈둥대다 잠이나 잘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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