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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일(12/6)
대생원에서 MMPI검사를 받고 검사지만 받았다. 검사지만 받아가는 학생이 심심찮게 있어서인지 결과지는 15분만에 나온다고 했다.
결과지를 받고 전화로 예약을 한 뒤 신림 양지병원에 갔다. 신림역 근처에 이런 종합병원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냥 몰랐다기보다도 무슨 아울렛 같은 건물 분위기 때문에 지나다닌다고 해도 병원인 걸 별로 눈치도 못 챌 것 같았다. 유리외벽에다가 에스컬레이터,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자동 피아노같은 것들 때문에 도무지 병원같은 느낌이 들질 않았다.
정신과에 가서 결과지를 의사에게 주었더니 의사가 언제 응답한 거냐고 물었다. 당일 낮이라고 했다. 어떤 마음으로 응답을 했냐고 물었다. 심경 설명하는 건 상담에서 너무 지긋지긋하게 했었고 그것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멘탈이 더 망가졌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듣는 것도 조금 힘들었다. 별로 할 말도 없이 그냥 했다고 말한 것 같다. 의사가 좀 심각하다고 그랬다. 그 외에도 언제부터 이랬는지, 그 무렵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족과의 관계는 어떤지, 환청이 들린다고 한 건 어떤 건지, 자살기도는 언제 어떤 걸 했는지 등등을 물었다. 약을 먹거나 목을 매거나 질식사 시도를 하는 얘기를 하고, 비닐봉지 뒤집어쓰고 수면 시도하기같은 건 거의 매일 한다고 하니까 의사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때까지 버텨왔냐고 물었다. 오늘도 못 죽었구나, 살지도 못하면서 결국 죽지도 못하는구나 같은 느낌이라고 답했다. 부모에게 이해를 받고 못 받고를 떠나서 일단 숨기지 말고 털어놓을 것을 권했다. 어차피 그렇게 하러 끌려내려갈 예정이라 힘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의사도 그걸 알아서인지 부모의 연락처를 미리 받아갔다. 자살행동을 매일 하는 게 문제인데 줄일 수 있겠냐고 물었고, 노력해 보겠다고 답했다. 처방받는 약은 한번에 먹는다고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것을 무척 강조하였다.
원무과에서 진단서와 처방전을 받으려고 하는데, 원무과가 하도 삐까번쩍해서 원무과인 줄도 모르고 한참을 우왕좌왕했다. 어찌되었든 결국 둘 다 받아서 근처 약국에서 약을 받았다. 렉사프로와, 불규칙한 수면 패턴 교정을 위한 진정제도 같이 처방을 받았다. 렉사프로는 첫 사흘 간은 10mg씩 투여하고, 이후로는 20mg씩 먹게 되는 모양이었다.
처방약을 가지고 학교로 돌아오면서 예수 믿고 천국 가라는 사람들과, 사고 싶어도 박력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소리를 질러가며 빅이슈를 팔고 있는 분을 보았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자기 삶을 살고 있었다.
밥을 먹고 코인노래방에서 노래를 5천원어치 불렀다. 노곤해진 몸으로 집에 들어가다가 세탁소에 패딩조끼를 맡긴 것을 떠올리고 옷을 찾았다. 자살행동을 줄이겠다고 의사에게 말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옷에 씌워 놓은 비닐이 질식 시도용으로 너무 마음에 들었다. 작은 비닐들은 애초에 머리에조차 들어가지 않아 입만 막는 일이 많고, 어떻게 머리에 쓴다고 해도 너무 작으면 정신을 잃기 전에 이미 숨이 막힌다는 느낌 때문에 결국 참지 못하고 비닐을 뜯어 버린다. 조금 큰 비닐들은 다 불투명한 것들밖에 없는데, 불투명한 비닐을 쓰고 있으면 다른 걸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호흡에 신경이 너무 쏠려서 인내심이 한참 떨어져버린다. 그래서 비닐을 벗겨서 혹시 쓰려거든 쓸 수 있을만한 위치에 놓아두었다. 쓰레기더미에 파묻힌 집은 신경을 쓰지 않으면 필요한 물건들이 다 사라져 버린다.
자기 30분 전에 약을 먹으라고 했는데, 피곤해서 약을 먹기도 전에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무척 즐거운 꿈을 꾸다가 새벽 2시 반쯤에 번쩍 눈이 뜨였다. 약을 먹고 다시 자려고 누워 있는데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한때 고장이 나서 허구한 날 울려대던 경보기인데, 방에서 담배를 펴도 울리지 않는지라 이번에는 정말 불이 나기라도 한 것인지 의아했다. 새벽이라 다들 즉시 반응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도 오래 울려대니 몇 명은 집 밖으로 나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창밖에서는 건물에서 나간 사람들의 대화 소리같은 게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대로 누워 있으면 타서 죽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건물은 경보기 소리만 빼면 정말 조용했다. 옷을 챙겨입고 나가기도 귀찮아서 누워만 있다가, 경보기조차 울리지 않게 되자 그래도 조금은 걱정이 되어 노트북과 핸드폰과 외장배터리를 챙긴 뒤 옷을 주섬주섬 입고 집 앞에 나갔다. 담배를 피우면서 건물이 멀쩡한지 올려다봤는데 대단히 멀쩡했다. 약을 먹은 후였음에도 잠이 다 깨버려서 새벽 4시는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1일 (12/7)
알람도 울리기 전인 8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을 뜨자마자 눈알이 저절로 뒤룩뒤룩 굴러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렘수면 상태에서 갑자기 잠이 깬 것 같았다.
진단서를 가지고 휴학을 하러 가야 하는데, 다시 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어날 수도 없었다.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뭔가 가라앉아 있는 것에 지렛대를 받쳐넣고 강제로 들어올린 것 같은 기분에 가까웠다. 몸은 여전히 물 먹은 솜 같았다. 12시까지 누워서 밍기적대다가 씻고 나와서 밥을 먹고 셔틀을 타러 갔다. 속이 울렁거리고 살짝 구역질이 났다.
경과를 별로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휴학신청을 하고 동아리방으로 돌아왔다. 피곤해 죽겠는데 쉽사리 잠이 들지 않는 감각과 비슷한 느낌이라 일단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고 나서 결국 잠이 들어서는 한참 동안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한번 잠이 들었더니 반대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충 두세 시간 정도를 그렇게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잠들었다가 깼다가 하면서 흘려보내고, 5시 반이 넘어서야 그나마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지금 이것을 쓰고 있다. 치료 상황에 대해서 좀 써놓는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무튼 지금도 여전히 죽도록 피곤한데, 그래도 정신은 좀 맑아지긴 했다. 왼쪽 관자놀이를 둔기로 천천히 찍어누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머리가 아프다. 기분은 아침 그대로, 그리 나쁘지는 않지만 안 나쁠만한 이유가 딱히 없고 뭔가 억지로 들어올려놓은 감각에 가깝다. 문득 또 졸리다. 집에 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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