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정병

정병일지 2/3/4일차

Gazamee 2016. 12. 10. 09:55

2일차(12/8 이어서)


하루종일 졸아대다가 퇴근을 했다. 허이모랑 같이 초밥을 먹으면서 매니저님한테 너무 졸아서 미안하다고 연락을 해 두었다. 스시 집에서 스시는 금방 다 먹어치우고 한참을 뭉개고 앉아 이야기를 했다. 허이모는 약을 먹으니 사람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했지만 내가 알기로 약효가 제대로 나타나려면 몇 주는 먹어야 하는데다 나는 원래 사람을 만날 때면 꽤 멀쩡해 보이는 편이다. 혼자 있는 게 문제지.


집에 들어갔다. 고향집에 내려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했다. 원래는 다음날 아침이 밝기 전에 자살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정말로 강렬하게 들었었지만 투약의 탓인지 아니면 졸려서 그런지 의욕이 도무지 생기지를 않았다. 그래도 약을 챙겨먹은 뒤 밍기적밍기적 자리에서 일어나서 저번에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세탁소 비닐을 뒤집어쓰고 목 부분을 봉했다. 봉지가 크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금방 숨이 차 올랐다. 잠시 벗어놓고 좀 더 있다가 많이 졸려지면 비닐을 쓰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3일차(12/9)


아침 8시쯤 눈을 떴다. 정말 반짝 하고 눈을 떴는데,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은 아차 내가 어제 죽지를 못해서 결국 집에 가야 하는구나 였다. 다 내던지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약의 영향인지 뭔가 돌발적으로 확 튀어나가는 행동을 할 기력이 극도로 부족해졌다고 느꼈다. 여전히 별 의욕도 없이 누워만 있다가 정오를 한참 넘기고서야 겨우 빨래를 돌렸다.


메슥거림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속이 여전히 좋지는 않았고, 그래서 밥을 먹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버스를 수십 분동안 타고 가야 하니 뭐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코바코에 가서 가라아게 오므라이스를 시켰다. 국회 탄핵결의안 표결을 초조하게... 아니 사실 그렇게 초조하지는 않게 기다렸다. 미 대선 때는 정말 초조하고 절망적인 기분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멍한 기분이고, 어떻게 되든 그렇게까지 개의치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가결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얼른 밥을 먹었다. 가라아게 카레가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 꾸역꾸역 밥을 끝까지 밀어넣었다.


버스에 타서 기차표를 확인하는데 딴에 주말이라고 표가 없었다. 계속 왔다갔다하며 취소표를 얻었다. 역에 도착하니 시간이 떴다. 배가 좀 아픈 것 같아서 화장실에 갔지만 대변이 나오지 않았다. 역 뒤편의 흡연 부스에 가서 담배를 피고 돌아왔다. 카페 같은 데에서 돈을 쓰고 앉아있고 싶지 않아 대합실 의자에 앉아있었다. 탄핵 가결 이후 동향에 대한 뉴스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TV 앞에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묵묵히 게임을 하다가 열차를 탔다. 마주보는 좌석이 있는 가운데 자리였다. 서울에서 울산까지는 거의 잠만 잤다. 항불안제 겸 수면제로 처방되는 브로마제팜이 너무 강한 것 같다. 다음 주에 병원에 가면 혹시 약을 바꿀 수 있냐고 물어봐야겠다.


부산에 오니 한밤중이었다. 엄마가 차로 데리러 왔다. 엄마도 언니도 아빠도 유쾌하고 따뜻한 분위기이고, 나는 이런 분위기에 끔찍한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몸에 밴 편안함을 동시에 느끼고 마는 내 자신이 지긋지긋했다. 별로 하는 말도 없이 곧장 씻고 나서 인터넷과 게임을 좀 하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 아빠는 술을 권했고 나는 약을 먹는 것 때문에 거절했다. 사실 과량이 아닌 음주는 괜찮다고 들었지만, 아빠랑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소간의 환청이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였다는 기억은 있는데 사람의 음성이었는지 무언가의 소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4일차(12/10)


전날 좀 일찍 자서 그런지 무려 새벽 5시 반에 반짝 하고 눈을 떴다. 브로마제팜을 먹으면 밤에 기절하듯 잠들어서 다시 깨어나기까지 대략 6시간 정도가 딱 걸리는 것 같다. 그 만큼만 자고 상쾌하게 일어날 수만 있으면 좋겠는데, 낮 시간대에 끔찍하게 졸린 것만 좀 어떻게 되면 좋겠다.


일찍 일어나서 시험감독을 나가는 엄마와 인사를 하고 거실로 나가 있었다. 내가 돌아와서 자는 방은 다 좋지만 콘센트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은 채로 만지면서 잘 수가 없다. 자는 동안에는 외장배터리로 충전을 했지만 그것도 배터리가 다 돼서 거실 멀티탭을 이용하려고 나갔다. 언니가 깼다. 시덥잖은 얘기를 하면서 웃었다. 낄낄대며 웃으면서도 내가 지금 이렇게 웃고 있는 것을 가지고 나중에 우울증 얘기를 했을 때 책이 잡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딱히 우울증에 걸렸다고 해서 사람이 24시간 내내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그저 울거나 침울해 있기만 하고,, 아무런 대화도 할 수 없는 그런 지경에 몰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가족들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가 내려오기 전에 먼저 의사에게 미리 부모에게 전화를 좀 해서 사정 설명을 해 달라고 할 것을 잘못했다. 아니 사실 의사와 만날 때도 집에 가기 전날에 일단 자살을 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으니까 무심코 사양해 버린 면도 있다.


혼자서 일찌감치 시금치와 시래기국에 밥을 먹었다. 언니가 계란을 구워 주었다. 뭔가 볼 것은 없는지 채널을 돌리다가 음악중심을 봤다. 아빠는 9시쯤에나 일어나서 언니와 같이 라면을 먹었다. 지금은 물을 받아서 아빠가 먼저 씻고 나왔고, 그 다음으로는 언니가 씻고 있다. 나는 도대체 언제 어떻게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야 할지 막막하다.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역정을 내고 나를 매도하겠지. 누구나 다 해낼 수 있는 것을 못 해낸다고 욕을 들어먹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줘도 뭐 하나 할 줄 모르는 한심한 인간이 될 것이며, 이때까지 똑똑한 줄 알고 우둥부둥 추켜세워줬더니 아무 것도 없는 인간이었다는 탄식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모든 것이 다 맞는 얘기라서 나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약물치료를 받고 싶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까지 한다고 해서 과연 내가 무엇을 하고 싶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약을 먹고 기분의 하한선을 더 높여준다고 할지라도 결국 나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은 똑같으며, 그 점이 나를 절망으로 밀어넣는다. 심지어는 약을 먹어서 기분이 그렇게 절망적이지조차 않은 것이 더 요원하다. 답이 없는 상황인 건 똑같은데 기분만 평안해졌다. 구덩이에 머리를 밀어넣은 타조가 된 것 같다.

'정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병일지 6/7/8일자  (0) 2016.12.15
졍병일지 4/5/6일차  (0) 2016.12.12
정병일지 1일/2일차  (1) 2016.12.08
정병일지 0일/1일차  (0) 2016.12.07
  (0) 2016.11.29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