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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

졍병일지 4/5/6일차

Gazamee 2016. 12. 12. 17:46

4일차(12/10 이어서)


아빠가 약수터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나가기 싫다고 해서 나만 집에 남아 있었다. 점심을 먼저 먹을까 했는데 기다리고 있으라길래 뭔가를 사오는 줄 알았더니 나가서 사먹자고 했다. 역시 거절했다. 아빠와 언니는 칼국수를 먹으러 가고 나는 집에서 시래깃국과 시금치나물에 밥을 먹었다. 식욕이 계속 없었다.


엄마는 생각보다 일찍 퇴근을 해서 돌아왔다. 나는 집에서 계속 자다 깨다를 반복한 것 같다.


저녁에는 엄마가 애호박전화 시금치전을 부쳐주었다. 아빠가 술을 먹을테냐 물었고 나는 거절했다. 약을 먹는다고 해서 술을 먹지 못할 것은 딱히 없지만 굳이 먹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물을 많이 마실 거라고 했고 시금치가 먹고 싶다고 했던 걸 가지고 아빠는 시금치를 산더미처럼 먹고 물을 미친듯이 마셔댈 줄 알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약을 먹으면서 식욕이 많이 줄었고 한 번에 밥을 일정량 이상 먹는 일이 줄어든 상태이며, 구갈의 경우 목요일에 정말 심했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다. 물론 예전보다는 물을 좀 마시기는 한다만.


엄마가 오늘 저녁은 그냥 자자고 해서 나도 약을 먹고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내일이구나, 싶은 마음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5일차(12/11)


여전히 아침에 눈을 반짝 하고 떴다. 수면제를 먹으면 수면의 질이 올라가서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을 자도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것 같다.


점심 때가 되어 시민공원 안에 있는 북카페에 가기로 했다. 엄마랑 언니랑 셋이 갔는데, 카페에 가기 전에 예약시간이 조금 떠서 공원 내 전시실에서 하고 있는 신라대 미대 졸업전시를 봤다. 요즘 미대 졸전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꽃이나 경치, 정물을 그린 구상화가 대부분이었다. 미술학원 광고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금방 발걸음을 옮겨 카페로 갔고, 예약해 둔 피자와 브런치에 치킨 샐러드를 추가해서 먹었다. 피자 도우에서 야채크래커 맛이 났다. 꾸역꾸역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언니는 나가 있고 엄마가 얘기를 해 보자고 시작했다.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냐고 물었고, 나는 비교적 담담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울증이 심해져서 도저히 논문을 쓸 수가 없었고, 이대로는 학고를 맞을 것 같아서 질병휴학을 했다고 했다. 엄마는 장래가 안 보여서 그러느냐, 혹시 뭐 실연이라도 했느냐 등 이유를 캐내려고 했지만 나는 딱히 할만한 말이 없었다. 미학과 부전공은 그만뒀냐고 하길래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만둔 시기에 대해서는 말하지는 않았다. 힘들면 부산에 좀 내려와 있으라고 하길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일단 해보고 잘 안되면 아빠가 어떻게든 일자리를 알아봐 줄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나는 능력도 없고 능력을 증명할 무언가도 전혀 없다는 얘기를 했더니 그런 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서 실소가 나올 뻔 했지만, 이미 울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굳이 비웃을 만한 기력은 없었다. 아빠는 내가 시간낭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엄마가 어떻게든 얘기를 잘 해보겠다고 얘기가 마무리되었다. 다음 학기를 다니면서 졸업을 하기로 약속했다. 엄마는 내가 뒤늦게 사춘기를 겪는 거라고 얘기했고, 나는 그 대목에서 모든 것을 포기했다. 수없이 이어졌던 자살기도 같은 얘기들은 입까지 올라와 보지도 못하고 통째로 삼켜졌다.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이고 우리는 여기서 정말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온하고 다정한 나의 가족을 나는 언제까지고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가 바깥에서 남의 집 애 씽씽을 타고 미친듯이 돌아다녀서 그걸 보고 엄마와 나 모두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이 엄마가 무슨 미친 인간이 다 있어 라는 표정으로 우리 쪽을 쳐다보며 씽씽을 챙겼고, 그 과정에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한껏 구겨진 표정이 기억에 남았다.


공원을 걸어 돌아가는 길에 내 머리 얘기를 했다. 엄마와 언니는 내 뒷머리에 아무런 세팅은커녕 드라이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푹 가라앉지도 않고 끝이 뒤집히지도 않는 것을 마냥 신기해했다. 나는 반대로 원래 그렇게 되는 것인지 의아함을 가졌다. 내가 내 머리를 하고 싶은 대로 해 본적이라곤 거의 없으니까. 애초에 늘 그랬다. 내가 뭘 바꾸어 보겠다고 했을 때 우리 집에서는 항상 난리를 쳤지만, 정작 하고 오면 잘 어울린다고 태평하게 말하는 그런 집이었다.


저녁에는 수제비를 먹을 거라며 반죽을 좀 치대 놓으라고 했다. 반죽이 너무 질게 되는 바람에 손에 쩍쩍 들러붙어서 고생을 했지만, 내가 수제비를 해 본적이 없으니 엄마가 배율을 맞춰놓고 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고생해가며 반죽을 했다. 아빠와 함께 산에 다녀온 엄마는 고기가 먹고 싶다는 아빠의 의견에 따라 백숙을 했다. 적당히 백숙과 닭죽을 먹고 방에 누워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꿈을 꿨는데, 인천 해변가에 있는 호텔에서 놀고 있는 꿈이었다. 나는 노라네 커플과 같은 방이었는데, 태풍이 왔는지 어쨌는지 창 밖은 깜깜하고 파도가 미친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십 몇층이 되는 방이니 괜찮겠지 하고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파도가 말도 안되게 높은, 그냥 봐도 10여 미터는 가뿐히 될듯한 엄청난 높이로 밀려오고 있었다. 겁에 질려서 저 정도면 이 건물까지 오는 게 아닌가 하고 말하는 순간, 파도가 백사장을 지나고 도로도 지나 우리가 있던 건물 외벽에 부딪치면서 부서졌고 그 물이 방 창문까지 튀었다. 그리고 건물이 기울면서 방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물이 차올랐고 노라네 커플도 나도 당황했지만 이미 서로의 말 같은 걸 들을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다. 파도를 내다보았을 때에 느꼈던 어마어마한 공포와는 대조적으로, 정작 물이 차오르고 숨쉴 공간조차 잃어 물 속에 완전히 들어가기 직전까지 가자 이렇게 죽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평온해졌던 것 같다. 그 순간 잠에서 퍼뜩 깨어났고, 거실에 있던 언니에게 횡설수설 꿈에 대한 얘기를 한 뒤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약을 먹고 꿈 내용을 트위터에 기록했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6일차(12/12)


좀 늦게 약을 먹은 탓인지 생각보다 늦은 9시에 일어났다. 원래 계획은 출근 전에 반신욕을 하는 아빠와 기상시간을 맞추어 한 번에 목욕을 하고 물을 아끼려 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다만 어차피 아빠랑 독대하는 순간 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것도 같다.


어제 만들어놓고 결국 거의 먹지 않았던 수제비 반죽은 엄마가 국물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언니를 깨워서 같이 해 먹으라고 준비를 해뒀다. 새벽에 자고 있는 나에게 말을 해 주고 갔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수제비를 잘 뜨지 못하는 우리는, 하루 묵어서 질겨진 반죽을 어찌저찌 뜯어 수제비를 해 먹었다. 그러고 나서 욕조에 물을 받는데, 원래 내 다음에 씻겠다던 언니는 마음을 바꾸어 다시 잔다고 했다. 나는 혼자서 씻고 나와서 가만히 거실에 앉아있었다. 뒤뜰에서 조그마한 아기고양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날이 추워서 보일러실 쪽에 길고양이가 새끼들을 낳고 지내고 있다더니 그 녀석들인 모양이었다. 두 마리라고 들었었는데 잘 보니 세 마리가 놀고 있길래 사진을 찍어 가족 카톡방에 올렸다. 아무도 세 마리인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내가 가족을 싫어하는 것이 사실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돼먹지 못한 반항심에 근거한 것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나는 언제까지고 가족을 그렇게까지 좋아할 수 없다는 생각만이 막연히 들 뿐이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 적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니까.


엄마의 노동력이 일방적으로 투입되어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 집과 따스한 날씨의 부산을 떠나, 다시 추운 서울에서도 가장 추운 관악산 귀퉁이에 있는 쓰레기장같은 내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사람들과 살을 맞대고 지내야 할 시간들과, 마치 사회생활 하듯이 가식적으로 웃어 가면서 완충제 역할을 이어나가야 할 시간들을 생각한다면 역시나 여기에 계속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짐을 챙겨 밍기적밍기적 집을 떴고, 버스에 타서 기차표를 확인했다. 3시 10분 차를 끊으면 조금 급할 것 같았고, 35분 차는 45분 차보다 도착이 오히려 늦길래 45분 차를 끊었다. 체크카드 결제 문자를 보니 통장 잔고가 미묘하게 늘어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 잠시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알바 월급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남는 시간에는 부산역 앞에서 담배를 피며 보건소에 전화를 해 약을 먹고 검진을 받아도 되는지를 물어보았다. 오늘은 전산담당자가 휴가이고, 내일 전자문진을 내일 아침에 임시저장 상태로 돌려주겠으니 거기서 수정하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탑승대기시간 전까지는 벤치에 그대로 앉아서 게임을 했다. 날씨가 따뜻해서 기분이 조금 좋았다.


저번에 날짜를 착각해서 예매를 하거나 잘못된 자리에 찾아가서 앉아있었던 것 등이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던지라, 몇 번이나 자리를 확인하면서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KTX 와이파이를 쓰려고 했는데 연결 상태가 영 좋지 않아서 그냥 테더링을 켜서 일지를 썼다. 머리가 멍하고 졸린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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