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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

정병일지 13일차

Gazamee 2016. 12. 20. 00:47

13일차(12/19)


아침에는 의외로 제시간에 일어난 것 같은데, 누워서 딴짓하느라 결국 뭐 하나를 버려야 하는 시간이 돼버려서 머리 자르기를 포기했다. 한동안 장사를 쉬었던 집근처 분식집에서 순두부를 먹었다. 같이 내주는 계란프라이도 반숙이고 찌개 안에 넣은 계란도 다른 곳에 비해 많이 안익혔다는 느낌이었는데, 요즘 조류독감 얘기로 난리라 살짝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워낙에 반숙계란을 좋아하는지라 맛있게 먹었다. 순두부는 4천원이었다. 자주 가게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성초에서 버스를 탔는데 웬일로 6513이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문에서 회차해 돌아오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탈만한 요소가 딱히 없을텐데 오늘 무슨 날인가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학생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왜 3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원래 그런 시간에 하교를 하나? 모르겠다. 중학생이었던 것도 벌써 10년이 지났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3시 정각에 병원에 도착해서, 예약 10분 전에 맞춰 왔네 라고 생각하며 예약증을 꺼내 보니 예약시간이 4시였다. 당황해서 뒤돌아 나갔다. 잘 생각해보니 지난주에 스케일링 예약을 취소한 게 3시 10분이었다. 실소하며 병원 밖으로 나가 담배를 필 만한 공간을 찾아보았다. 대로변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병원 옆이니 신경이 쓰여서 병원 건물 옆으로 난 골목길로 쭉 올라갔다. 근처 바닥에 담배꽁초들이 떨어져 있는 전봇대를 발견하고 그 앞에 서서 담배를 폈다. 꽁초는 바닥에 버리지 않고 담뱃갑 비닐 안에 꽂아두었다.


운영회의 안건지를 써야 했고(=누군가는 써야 하고 그게 아마도 나거나 적어도 내가 어느 정도의 기여는 해야 함), 날도 따뜻하고 하니 병원 뒤쪽의 야외 휴게공간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윈도우 업데이트 때문에 부팅하는데만 시간이 한참 걸렸다. 작년 2학기 종강총회 안건지를 기반으로 내용을 조금 다듬었다. 망트가 이런 서식이 있었으면 공유 좀 해주지 그랬냐고 했던 게 문득 생각났다. 하지만 난 그냥 워드 기본 서식을 썼을 뿐이다. 워드든 한글이든 기본적으로 서식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좀 신경써서 찾아보고 고르기만 하면 그만이다.


아무튼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아서 안건지 완성은 못하고 중간 세이브를 한 뒤 진료를 받았다. 약을 먹어도 잠을 예전처럼 잘 자지는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뭐 아무튼 의사가 다 알아서 하겠지라는 느낌이었다. 2주치 처방을 받았다. 다음 예약 시간은 3시 45분인가 그랬고 이번엔 안 까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러다가 무심코 다음주에 가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은 조금 되긴 하는데 아마 괜찮지 않을까 싶다.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았다. 처방약을 기다리면서 앞 손님과 약사분의 대화를 들었는데, 시금치와 두부를 같이 먹으면 결석 치료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를 했다. 고등학교 급식에 시금치랑 으깬 두부를 무친 반찬이 종종 나와서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났다. 아무튼 내 약이 나왔고, 평소대로의 금액을 생각하고 현금을 준비하다가 2주치 약이니 금액도 두배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카드 결제를 했다. 조금 민망했다.


신림역으로 가는 언덕길을 지나며 오늘도 또 종합병원 앞길에서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얼굴에 복이 많다 어쩌구 하는 미치광이 사이비들이 있을지 약간 기대를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불신지옥 어쩌구 하는 종자들도 전혀 보이질 않았고 대신 기어다니며 구걸을 하는 분만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설입으로 가서 셔틀을 타고 학교로 갈까 하다가, 그러는 게 더 귀찮아서 5516을 타고 학교로 갔다.


숨비에게 와이파이를 넘겨주고, 잽싸게 지도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 또 말없이 뭐 바꿨다고 예의없는 놈들이라면서 인준 안해주셔서 빠꾸 먹는 건 다시 하고싶지 않았다. 게다가 교수님은 솔직히 말해서 여학생에게 좀 더 쩨쪠하게 구는 면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 그게 지겹다... 에휴 어쩌겠어... 아무튼 순식간에 처리하고 나서 되다 만 안건지를 마저 쓰려는데 아무래도 더 이상은 손을 대기가 싫어서 쓰다 만 파일을 알파카에게 넘겨주었다. 그러고 나서 잉여롭게 게임이나 하다가 오랜만에 회의 전 도시락을 시켜 먹었다. 웬일로 내 돈을 주고 돈까스류를 사먹었는데 그런대로 먹을만 했다. 밥이랑 돈까스가 애매하게 남겠길래 끝까지 꾸역꾸역 다 먹었다.


회의는 별것 없이 비교적 간결하게 끝났다. 내가 대표할 시절에 너무 큰 일들이나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건들이 많아서 몇 시간씩 했었지, 요즘은 한두시간 정도면 할 얘기 다 하는 것 같다. 회계 정리가 아무래도 불안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싶다. 우리 동아리가 뭐 그런거 좀 늘어진다고 해서 난리가 나고 다 뒤집어질만한 곳도 아니고.


회의 끝나고는 신입들에 내가 얹힌 느낌으로 뒤풀이에 갔다. 뭐 어디 갈만한 데는 다 만석이라 링고에 갔다. 쓸데없이 비싼 건 여전했다. 런던 프라이드라는 이번달의 술을 시켰다. 딴건 모르겠고 무료 사이즈업 되는 게 좋았다. 그다지 얘기를 나눠 보지도 않았고 솔직히 아직 이름도 잘 모르겠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자리였지만 그런대로 편하게 있으면서 대화를 한 것 같다. 약을 먹기 직전같았으면 아예 술자리에 가지도 않았거나, 가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술만 홀짝홀짝 들이키다 왔을 것이다. 마음이 평안하니 이런 게 되는구나 싶었다.


2차 가는 사람들을 보내고 나는 설입까지 걸어왔다. 501을 타고 종점까지 갈까 하다가 5515 줄이 생각보다 짧길래 타고 녹두로 왔다. 코인노래방에서 2천원어치 노래를 불렀다. 예전같았으면 물 한병으로는 좀 모자랐을텐데 요즘은 물을 마구 들이키지 않는 데에 익숙해져서 8곡을 부르는데 물이 오히려 조금 남을 정도였다. 중간에 게임 체력이 다 찼다는 알림이 떠서 마지막 두 곡은 부르면서 퍼즐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일은 첫 화요일 출근이고, 퇴근하고 나면 허이모랑 그 희대의 괴식인 까르보나라 감자탕을 먹어보기로 했다. 대단히 기대가 된다. 과연 빨봉분식을 이길만한 괴식이 될 것인가... 한동안 업데이트를 하지 않고 방치했던 녹두에서 먹고살기도 좀 갱신을 해야 할 것 같다. 할 수 있는 일들부터 조금씩 조금씩 하라고 의사가 그랬고, 나도 특별히 큰 목표를 갖고 지내는 겨울이 되지는 않을 터인지라 손 닿는 작은 일들부터 해나가려고 한다. 근데 일단 방부터 좀 어떻게 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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