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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

정병일지 14/15일차

Gazamee 2016. 12. 21. 14:34

14일차(12/20)


화요일 첫 출근인 걸 안 까먹고 제대로 출근했다. (매니저님 갠톡보내고말이야... 안까먹는다구...) 출근길에 농협에 들러서 돈을 뽑았다. 학교 근처를 벗어나면 굳이 학생증을 쓰고 싶지 않지만 다른 카드를 만들기도 또 귀찮기 때문에 현금을 항상 어느정도 보유하는 것이 편하고, 그래서 출근길에 주거래은행이 있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어째서인지 학교에서는 돈 뽑아야된다는 사실을 놀라울 정도로 항상 까먹는다. 아니 사실 거기서는 학생증 그냥 쓰면 되니까 당연한 건가.


지난주에 했던 건강검진 결과가 미묘하게 신경이 쓰여서 출근길에 있는 웬만한 계단은 다 걸어서 오르내렸다. 체중 자체보다도 다리 근력만 표준을 못 찍는 부실함이었던 게 신경이 쓰였다. 빠른 걸음으로 종종대며 걸어다니기를 좋아하는데 점점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게 그래서인가 싶었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날은 정말 누워서만 지내긴 하지만 최소한 밖에 나가는 날이라도 좀 더 걷는 쪽으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뭐라도 안 움직이는 것보다야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게 좋겠지 뭐.


출근해서 매니저님 부재중전화를 몇 번 처리하고(전화받기 진짜 개못했는데 이제 좀 적응이 되었다. 다행) 지난주랑은 다른 영상을 뭐 또 봐야된다고 그래서 보고 있는데,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불려나갔다. 아직 설계도면만 나와 있는 빈 지하공간에 규격에 맞게 노끈을 쳐서 구획을 나누는 일이었다. 공간감이 개 쓰레기라서 혼자 갔으면 절대로 아무것도 못 했을거고, 매니저님 다음으로 나름 친하다고 생각되는(내맘대로) 분이랑 같이 갔다. 알고보니 높으신 분이셔서 다들 자기를 좀 무서워한다는데, 일단 스타트업이라 나이차가 그렇게 안 나기도 하고 나야 뭐 그냥 일개 알바라서 그냥 아무말대잔치 하면서 열심히 구획을 나눴다. 노끈 한 롤이 다 떨어져서 중간에 마트 나가서 두 롤을 더 사왔다. 노끈이 끝나는 순간을 살면서 처음 본 것 같았다. 전반적으로 육체적으로 특별히 고되지는 않은 수준이면서 가볍게 움직이는 활동이라 그런대로 좋았다.


작업이 끝나고 나니 딱 점심시간이었다. 코엑스 앞 행사하는 데서 밥을 먹으려고 사람들이랑 다같이 가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포기하고 코엑스 안에 있는 중화요리점을 갔다. 짬뽕이랑 미니탕수육 세트를 시켰다. 밥도 조금 나왔다. 예전 사무실 쪽에서 먹었던 짬뽕보다 훨씬 맛있었고, 매콤한 맛이 강해서 좋았다. 정신 차려보니 면도 탕수육도 밥도 다 먹었다. 렉사프로 때문에 가셨던 식욕이 이젠 거의 다 회복된 것 같았고, 이렇게 항우울제의 가장 대표적 부작용인 체중 증가 루트를 타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근무는 상시 하는 업무를 보면서 영상을 봤는데, 확실히 지난주보다는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가 있었는데 3강의 수강율이 무슨 짓을 해도 90%에서 더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라는 것도 다 해보고 굳이 눌러볼 필요가 없는 세부 정보까지 일일이 다 체크를 했음에도 불구하곡 절대로 수강율이 100%가 되지 않아서 짜증이 났다. 중간에 뜨는 팝업퀴즈가 두번 다 똑같은 게 떠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것때문에 시스템 자체가 수강율을 100%로 카운트하지 못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기본적으로 전체 수강율이 90% 이상이면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도 되는 수준이었지만, 하나만 90%가 떠있는 게 괴악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트위터 계정에서 숫자에 집착하는 면을 좀 버린 이후로 이런 숫자 강박적 면모에서는 다소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지금까지 이렇게 별 쓸모도 없는 숫자에 화가 난 적이 없었다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무려 30분동안 심박수가 증가하고 호흡이 가빠졌다고 느낄 정도로 짜증이 솟구쳤으며 마음같아서는 의자에 앉은 채로 사지를 미친듯이 흔들어대며 발광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비타민음료와 과자를 구겨넣으면서 마음을 겨우겨우 가라앉히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별것도 아닌 일을 대상으로 분노를 조절하는 데에 곤란함을 느낀 적이 없었기에 스스로도 좀 어이가 없었다. 이제 정신과에는 신년이 되어야 갈 예정인데 좀 걱정이 되었다. 이런 돌발적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일단 잊지 않기 위해서 이 일지를 쓰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이후로는 여전히 분이 채 가시지 않아 씩씩거리면서 영상을 보고(몇 가지 내용 빼고는 대체로 더럽게 재미가 없었고 플래시도 못 만들어서 여기저기 오류가 산재했고 퀴즈라면서 말장난 치는 내용이나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내용이 막 나오는 등 아주 개판이었다) 일을 하다가 제때 퇴근을 하였다. 허이모댜른이랑 까르보나라 감자탕이라는 미친 메뉴를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걸 미리 대비하려고 점심에 짬뽕을 먹은 것도 있긴 했다. 가다가 낙성대에서 내려서 허이모랑 같이 버스를 타고 녹두로 갔다. 뼈르보나라(ㅋ..)의 리뷰는 따로 쓰기 귀찮으니 트위터에 쓴 내용 복붙으로 대체한다.


저는 빨봉보다는 나았습니다 제가 크림소스를 좋아하기도 하고 같이 먹으라는 밥을 거의 같이 안먹고 내팽개쳐둔 결과 입에서는 그런대로 잘 먹음 대신 식도부터 위까지가 난리나면서 크림소스에 위액이 더해져서 자꾸 올라오긴 함


소스랑 면이 눌어붙는게 너무 어쩌구였고 제가 살다보면서 파스타 면 누룽지를 먹어보기도 처음이었는데다가 해산물+돼지등갈비+크림소스(것도 동네분식집 까르보나라 느낌)라는 존나 하나같이 다 비린 조합을 해놔가지고 느끼+비림 대잔치지만 최소한 싱겁진 않음


그리고 고기에 감자탕용 기본밑간이 되어 있는 상태라서 더 괴악하다는게 허이모의 평이었지만 그거 없었으면 비려서 먹는 즉시 구역질 났을것같은데 그렇진 않았고 어찌됐든 고기 자체는 야들야들하고 뼈에서 잘 떨어지는 편이라 일반메뉴 먹으면 괜찮을듯함


전반적으로 자취 초기에 크림 없이 우유랑 치즈만으로 크림스파게티 만들어 먹던 시절에 대충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 더 남겨두면 위험해서 다 때려부은 뒤 그냥저냥 먹는것같은 맛이고요 물론 돈주고 사먹을만한 맛은 아니라고 보지만 어쨌든 난 빨봉보다는 낫다


허이모는 빨봉이 이것보단 낫다고 평해서 저랑 완전 평이 갈렸는데 저의 경우 크림소스에 대한 선호가 강한 반면 식사용으로 먹는 것의 맛에서 단맛이 가장 주로 오는 것을 극히 싫어하며 돈까스와 떡볶이의 이질적 식감이 너무 불쾌했었기에 이렇게 되었다


일단 허이모보다도 댜른이의 반응이 정말 드라마틱했는데(얘가 뭔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까지 극혐하는거 너무 오랜만에 봄) 그러고 나와서 일단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입가심을 하러 어딜 갈까 하다가 전시용 튀김을 가게 앞에 쌓아두기로 유명한 박명주떡볶이에 갔다. 내부 자리가 좁아보이긴 했는데 진짜 좁았다. 라볶이랑 무슨 이태리튀김이라는 게 있어서 그 세트를 시켜봤는데, 할머니가 예전에 요리프로 보고 해주신 볶음밥튀김의 맛이 났다. 왜 이태리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라볶이는 평범하게 맛있었다. 계란이 없어서 좀 슬펐다.


나와 마찬가지로 건강검진 이래로 괜히 별로 더 노력하는 것도 없으면서 공연히 건강에 신경만 좀 쓰이는 허이모가 있었던지라, 후식을 먹고 나서는 하릴없이 녹두를 산책했다. 놀이터에 가서 운동기구들 타면서 동네 약수터 느낌도 좀 내보고, 흔히 녹두의 끝이라고 불리는 미림여고 쪽까지 쭉 넘어갔다가 중앙어쩌구마트 구경도 했다. 나는 녹두에 이렇게 거대한 마트가 숨어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긴 있는 걸 안다고 해서 굳이 거기서 장을 볼 일이 없기는 한게, 거기서 뭘 사서 집까지 오려면 동선이 너무 꼬이고 오르막길이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간만에 보는 대형마트 구경을 신나게 하고 허이모댜른을 버스 태워 보낸 뒤 코인노래방에 갔다. 오늘은 사장님이 계셔서 물 한병을 공짜로 주셨다. 맨날 물 두병 뽑아 들어가는 나에게는 아이스티보다는 물이 낫다는 것을 전부터 눈치만 채시고 아직 실행을 못하셨던지라 뭔가 드디어 한건 처리했다는 느낌이었다. 구석방 들어가서 목소리 편차가 큰 노래들을 번갈아 불러가며 4천원어치 놀았다. 중간에 옆방에서 놀던 인간들 무리 중 하나가 나와서 내 방을 확인하고 갔는데,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한명이라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것 같았다. 내가 목소리 바꿔가면서 노래 부르는게 뭐가 어때서...


집에 와서는 한참동안 약을 안 먹고 있다가 한 1시쯤에 이젠 먹어야지 하고 먹었고, 역시나 바로 잠들기는커녕 3시가 넘어 잠이 들었다.



15일차(12/21)


오늘 하루는 한참 남았지만 이걸 빨리 기록해 놓아야 할 것 같아서 일단 허겁지겁 쓴다.


새벽 3시가 넘어서 겨우 잠이 들었고 낮 12시 반이 좀 지나서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는데, 그 사이의 수면의 질이 정말로 최악이었다. 원래부터 또박또박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대화체 언어로 잠꼬대를 하는 습성이 있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하룻밤 내내 그 짓거리를 했다. 주변에 같이 자는 사람(언니, 고등학교 룸메이트, 할머니 등)이 있어서 증언을 해 준 경우도 있었고 자취를 하면서도 내가 스스로 내 주둥이가 움직이는 감각 때문에 잠이 깨서 입을 닫고 다시 잠드는 일도 많기는 했었다. 하지만 하룻밤 내내 이런 적은 정말 없어서 지금 굉장히 심적으로 피곤하고 소모된 느낌이 강렬하다.


꿈 내용은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이건 사실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닐 것도 같지만, 어쨌든 일어나자마자 좀 더 빨리 기록을 진행했으면 보존할 수 있었을 것 같아서 아쉽다) 확실한 건 내가 자꾸 꿈 내용을 남들에게 전달하는 변사라도 된 마냥 막 설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도 좀 기분이 별로인 게, 보통 내가 하는 잠꼬대는 언제나 그 꿈 속에서 인물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었고 제 3의 청자를 가정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입을 나불거리다가 잠에서 깬 것이 비몽사몽간이었던 내가 기억하기로만도 예닐곱 번은 된다. 게다가 평소같았으면 '아 내가 잠꼬대를 하고 있구나'라는 걸 자각하고 입을 다문 뒤 다시 잠드는 것이 항상 가능했는데, 오늘은 그것도 되지 않아서 내 주둥아리가 멋대로 장황한 잠꼬대를 늘어놓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중간에 끊을 수가 없어서 입이 알아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무력감이었다. 그나마 안 깨고 계속 잠꼬대를 하는 것보다는 얘기가 좀 빠르게 마무리가 된 게 아닐까 하는, 별 위로도 안 되는 불확실한 기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요즘 브로마제팜을 먹는게 처음 잠이 드는 과정을 좀 더 매끄럽게 해준다는 것 외에는 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하긴 했는데, 오늘 이렇게 되고 나니까 정말로 수면의 질이 너무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건 약에 몸이 적응돼서라기보단 내 방 환경이 하도 안좋아서 그런 것같기도 한데, 아무튼 좀 어떻게든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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