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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주에 한 번 양지병원을 찾으면 정신건강의학과 이기경 과장님은 매번, 여태 살면서 나에게 이렇게 자비로운 표정을 지어준 사람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얼굴을 한 채 "너무 힘들면 수료라는 방법도 있어요"라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해 그저 진료실 안에서 헛웃음을 짓고, 그간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나눈 뒤 진료실을 나와 다음 예약 일정을 잡는다. 수납을 하고 병원 앞 약국에서 약을 타는 것도 벌써 몇 달째이고, 그동안 다종다양한 약물을 처방받았다. (요즘은 불면증이 너무 심해서 몸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일이 빈번한지라, 결국 그 이름도 유명한 졸피뎀을 처방받기에 이르렀다) 약값 계산을 하고 나와 신림역 사거리를 지날 때만큼은 나는 어쩐지 삶을 제법 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쓰레기더미에 파묻힌 방으로 돌아오면 다시금 대부분의 의욕을 잃는다.
복학계를 제출하지 못한 사이에 졸업신청 연락이 '재학생'들에게만 간 모양이라, 뒤늦게 졸업신청 기한이 지났음을 깨닫고 과사 조교님께 메일을 보냈지만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하는 것이 빠르다는 것은 알지만 매 학기마다 귀찮게 굴었던지라 면목이 없어 전화를 하기도 무섭다. (사실은 거짓말이다. 그냥 대부분의 인간과 육성으로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심히 두렵다. 나는 나의 정신병을 연민받고 싶고, 내 인생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을 모두 그 탓으로 돌리고 싶다) 아마 신청 자체는 어떻게든 될테다. 더 심한 경우도 어떻게든 해결되는 경우를 수차례 보아왔다. 사실 정 안되면 또 졸업을 유예해도 나는 괜찮다. 물론 집에서는 괜찮아하지 않겠지만, 50대 중반에 접어든 부모님은 이제 식탁 의자 따위를 휘두를 기력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는 졸업논문 자체에 대해 생각한다. 읽는 능력도 쓰는 능력도 엉망이 된지 오래고, 교양 레포트 수준 이상의 연구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애초에 가져본 적도 없다. 조울증 때문인지, 약물 때문인지, 아니면 두 가지 모두가 원인인지 몰라도 아무튼 선행성 건망증까지 나를 심히 괴롭히고 있다. 까마득한 옛날 일들은 잘도 떠올려내면서 당장 입을 열어 하고 있던 말조차도 잊어버리기 일쑤다. (가까운 친구들은 "당신 거의 금치산자 상태잖아"라며 웃었다. 나도 웃었다)
수료, 수료, 수료라는 방법도 있어요. 수차례에 걸쳐 들어온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당신은 예과 본과 국시 인턴 레지 다 뚫고 3차병원 과장까지 하고 있으면서 남일이라고 그렇게 말하나요, 라는 생각을 했던 주제에 수료라는 말에 솔깃하는 내가 있다. 학사 졸업을 해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생일텐데 하물며 수료라니, 하고 고개를 젓는다. 그러다가 이러나 저러나 인생 망한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졸업논문을 쓰는 데에는 벌써 1년에 걸쳐, 두 번이나 실패했다. 하지만 역시, 여기서마저 도망칠 수는 없(어야 한)다. 어차피 떨어져 박살날 벼랑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마무리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짓누른다. 물론 내 등을 떠밀어 주는 건 전혀 아니고, 그냥 짓누른다. 납작 엎드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 무게에만 하릴없이 깔려 있다.
더이상 도망치지는 말아야지, 하면서 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글을 쓴다. 이것이야말로 도망이다. 내가 무언가를 쓴다면 그것은 언제건 가장 현실적인 의무로부터의 도망이었다. 아무것도 감당하지 못한 채 도망만 다니는 나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긋지긋하게 여긴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내가 힘들다는 것을 전시하고 싶기는 하지만, 병증을 아무에게나 내던지며 아무튼 나를 구해달라고 매달리고 싶지는 않다. 의사 외의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할 의무도, 실제로 할 수 있는 능력도 딱히 없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소수의 친구들이 위안을 주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들은 그래도 훨씬 똑똑하고 의욕이 있어 보인다)
26살의 나는 아직도 자신에게 묻는다. 커서 뭐 될래? '큰다'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장 '뭐가 되어야' 하는 상황은 코앞에 닥쳐 있다. 나는 클 수는 있을까? 뭐가 될 수라도 있을까? 일단 뭐가 되면 클 수가 있을까? 그때가 되면 좀 괜찮아질까? 그런데 정말로 내가 뭐가 될 수 있기나 할까?
증량한 조울증 약과 항불안제를 먹고도 극히 심란한 밤이다. 수면제를 먹고 강제로 오늘을 닫으면, 다섯 시간쯤 후에 어떻게든 내일은 올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끔찍한 자살 욕구가 밀려오지만, 너무 많고 또 다양한 실패를 겪었던 나는 완전한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다. 그냥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꾸역꾸역 약을 먹는다. 어떻게든 될 리는 절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계적으로 살아남는다.
심신이 정말로 건강한 극소수의 인간들과,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며 그를 통해 노력하며 살아갈 수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쟤 또 징징거리네"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제법 탁월한 인류애를 품은 자라면 "힘내"라거나 "일단 작은 것부터라도 해봐", "아르바이트 하는 데서 계속 일할 수는 없니?" 같은 걱정과 연민이 어린 말들을 안겨줄 것이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징징거리는 입이라도 좀 닥치고 그 시간에 뭐라도 해 보려고 노력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한심한 삶에 질려버리는 것이다.
정신이 굴러떨어지는 것은 끝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는 채, 그저 지금의 내가 중언부언하고 있다는 것만을 스스로 느낀다. 억눌러왔던 시커먼 절망들이 명치에서부터 스멀스멀 퍼져나간다. 해봤자 4주밖에 복용할 수 없을 졸피뎀을 먹을 때가 되었다. 잠들어버린 나는 스스로를 죽일 수 없고, 새벽 알람이 울리기 전에 어이없을 정도로 상쾌하게 깨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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